Shadow4
언론인권통신

[언론인권통신 제863호] '할머니'라는 호칭과 언론의 시대착오적 프레임

작성자 정보

  • 언론인권센터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263_8925.png



'할머니'라는 호칭과 언론의 시대착오적 프레임

   2020.06.10.

  



[1] <언론인권칼럼> ‘할머니’와 ‘계모’라는 표현이 언론에서 사라지길 바라며 

[2] <언론인권센터 제2기 시민기자단> 미디어에 비친 성소수자, 돼서는 안 될 특이한 존재?

[3] <위클리 미디어픽> 두 개의 부고기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4] <유튜브 컨텐츠> [언론에 당해봤어?] 막내 인턴 판례 소개 1: 가발 살인 사건의 진실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278_6516.png


‘할머니’와 ‘계모’라는 표현이 언론에서 사라지길 바라며


허찬행|청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노인 집단에 대한 미디어의 재현은 그들을 독자적인 한 개인으로 보기 보다는 ‘불쌍한’ ‘힘없는’ ‘의존적인’ ‘이기적인’ ‘고집스런’ 존재로 정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배우자와의 이혼이나 사별, 입양 등 다양한 형태로 가족이나 부모자식 관계가 재결합하는데도, 여전히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언론은 ‘계모’나 ‘의붓어머니’를 소환해 그들의 문제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콩쥐팥쥐’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모(의붓어머니)’는 자식들을 미워하고 학대한다는 전근대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30년 동안 일제의 위안부 피해 만행을 알리고 사죄와 피해 보상 운동을 해온 정의기억연대는 부실회계, 회계 부정 의혹, 후원금의 사적 유용 의혹 등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검찰 수사를 받고 있으며, 윤미향 의원은 이미 ‘파렴치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부실 회계가 오류라 하더라도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불법이 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용수 여사(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성을 높여 이르는 사전적 정의에 따랐다)는 2차 기자 회견에서 “정대협(지금의 정의기억연대)이 할머니들을 고생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이용해먹고”라고 했으며, 회견문에는 “30년 동지로 믿었던 이들의 행태라고는 감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당혹감과 배신감,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언론은 이용수 여사의 발언과 주장을 전하면서, ‘이용수 할머니’라 호명하였다. 2차 기자 회견 이후 일부 언론들이 ‘이용수씨’, ‘이용수 선생’, ‘이용수님’ 등으로 호칭을 달리하는 변화가 있었으나, 그는 어디까지 ‘이용수 할머니’였다. 사회적 공인으로서 그의 주장은 합리적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하고, 사실 관계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로 언론이 호명하면서 그의 주장은 ‘불쌍하고 힘없는 할머니’의 외침으로,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힘없고 불쌍한 할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일처럼 돼 버렸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에 대한 의문은 ‘배후설’로 공격 받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라고 언론은 다루었다.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나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나 범인은 ‘의붓어머니’나 ‘계모’라는 점이 부각된다. 자녀가 있는 여성이나 남성이 재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증가하는 시대적 상황과는 동떨어진 전근대적인 시대 인식이 고스란히 언론을 통해 선입견으로 이어진다. 자녀에 대한 학대나 살해는 친부모나 새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데서 비롯되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다. 즉, 친권이나 양육권이라는 명목으로 자격 없는 부모들로부터 학대당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험에 방치하지 않는 길은 친권이나 양육권을 박탈하여 학대나 살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공동체가 이들의 양육을 책임지는 제도적인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언론은 중대한 자녀 학대나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 ‘부모가 어떻게 자기 자식을 저렇게 하는 가’라는 수준에서, ‘친부모가 아닌 의붓어머니(계모) 또는 의붓아버지(계부)니까 저런 참혹한 짓을 했다’는 편견을 조장하는 보도 행태가 이어져 왔다.


  한 주체로서 ‘OO씨’나 성명 뒤에 사회적 지위 등을 표기하면 될 것을 ‘할머니’를 소환해 공인의 발언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 비판에는 소홀하고, 자녀 학대나 살해에 대한 친권이나 양육권의 한계 등 본질은 다루지 못하면서 ‘계모’ 또는 ‘의붓어머니’를 호명해 자녀 학대나 살해의 주체로 편견을 조장하는 언론의 행태가 개선되길 바란다. 보다 급진적인 제안을 하자면 이제는 언론 보도 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의붓어머니 또는 계모 따위의 편견적인 표현을 없애보는 건 어떨까. (20.06.10.)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289_0665.png


미디어에 비친 성소수자, 돼서는 안 될 특이한 존재?


  ‘혐오’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다양한 미디어에서 차별과 혐오를 나타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미디어는 수용자인 대중들에게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의제들을 파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의제설정 효과’라고 하는데요. 이는 단지 뉴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능, 드라마 등 여러 형태의 미디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중들은 미디어가 무엇을, 어떻게 의제로 설정하는지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접하는 뉴스를 포함해서 미디어에 비친 성소수자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297_4862.png


우리는 매일 쏟아져나오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건강한 미디어 환경을 위해서는 공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양질의 콘텐츠가 늘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좋은 콘텐츠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위미픽(Weekly Media Pick)에서는 매주 우리가 놓치지 않고 함께 고민해보면 좋을 만한 이슈와 콘텐츠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두 개의 부고기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찬바람 불던 겨울날 별안간 시작된 코로나19 사태. 벌써 폭염주의보가 내려지는 날이 되었지만 아직 사태는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은 펜데믹 상황에서 비교적 효과적으로 감염병에 대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수도권 확산이 우려되는 등 아직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상황이 더욱 심각합니다. 6월 10일 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200만 명, 사망자는 무려 11만 명을 넘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 모두 압도적인 세계 1위입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점점 무뎌지는 탓도 있겠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숫자에 선뜻 사망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상상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23일 뉴욕타임스가 인상적인 1면을 발행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1,000명의 이름을 빼곡히 적은 부고 기사를 실은 것입니다. 단순히 희생자들의 이름만 열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과 나이와 함께 간단한 소개를 덧붙였습니다. ‘손주의 학기 첫날마다 노래를 불러준 할머니’부터 '매일 자녀를 학교까지 바래다준 어머니’. ‘30년간 스쿨버스를 운전한 할아버지’까지. 이를 두고 미국 내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마스크 착용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 등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효과적인 보도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뉴욕타임스의 지면을 보고 있자니 작년 말 경향신문에서 했던 유사한 시도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작년 11월 21일자 경향신문의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이들은 2018년 1월 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주요 5대 사고로 숨진 노동자 1,200명의 이름으로 1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의 사망 사고 이후 산업재해와 비정규직 문제가 공론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인 한국의 노동 환경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었습니다.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310_2163.png



  이러한 ‘부고 기사’가 문제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두 보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통계 뒤에 가려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입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 제목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통계로는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개인들의 죽음, 그들을 사랑하고 함께 추억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고통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경향신문 보도 역시 추상적인 통계와 일회적인 사건·사고 보도 대신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에 ‘매일 수많은 김용균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기사 모두 단순 보도가 아닌 ‘인터랙티브 콘텐츠’ 방식을 활용했다는 점인데요. 매체 변화에 맞는 효과적인 편집기술로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핵심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와 그에 대한 진정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보도들을 통해 아스러진 생명과 존엄 앞에 조금 더 숙연해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326_3881.png


▲ [언론에 당해봤어?] 막내 인턴 판례 소개 1: 가발 살인 사건의 진실 
언론인권센터 유튜브에 새로운 컨텐츠가 게시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20bf718816dcdc07bf85d597818cead2_1677043353_7638.png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회 회의
○ 2020년 6월 11일(목) 오후 2시
○ 언론인권센터 사무실

제3차 북한 관련 보도 및 프로그램 모니터 모임
○ 2020년 6월 12일(금) 오후 2시
○ 언론인권센터 사무실  

제41차 정보공개운동본부 실행위원회 회의
○ 2020년 6월 15일(월) 오후 12시
○ 언론인권센터 사무실    


 

관련자료

공지사항